[문동주 자서전3] 더 넓은 무대, 광주의 교직생활
[문동주 자서전3] 더 넓은 무대, 광주의 교직생활
  • 문동주
  • 승인 2019.06.1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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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효동학교 재직시절 교직원들과 기념사진.
광주효동학교 재직시절 교직원들과 기념사진.

‘벽지점수를 확보해야 승진이 빠르다. 그러니 섬으로 가라’ ‘그래도 전남교육계에서 활동하려면 광주를 거쳐야한다’

많은 분들의 조언을 들으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광주전출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보니 두려움 반 걱정 반 정말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78년 3월1일자로 지금은 폐교가 되어버린 광주지원초등학교로 전입되었다.

광주! 꿈에 부풀어 올라왔지만 변두리 소규모학교는 통근하기도 여간 불편했고, 숙직 시에는 밥을 스스로 해 먹어야할 정도였다. 그러나 광주의 정서를 익힌다는 생각과 각 시·군에서 뽑혀오신 분들이기에 선의의 경쟁 속에서 열심히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5학년을 맡았다. 연구수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해도 어려운 것이 수업인데 막상 공개하게 되니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실태에 맞게 수업을 진행했다.

이제 반성회에서 어떤 말들이 오갈 것인가? 걱정되기도 했다. 시내권의 반성회 형식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김기평 교장 선생님께서 강평하실 때에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라는 말씀을 서두로 많은 칭찬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철들어도 칭찬에는 약한가 보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훌쩍 그 곳 지원교에서 1년을 보내고 말았다.

103학급·3부제 수업 효동학교 시절

79년 3월1일자로 광주효동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영광에서 교육장으로 모셨던 박말갑 교장선생님, 그리고 두 분(류기준, 박승주)의 교감선생님을 모시게 되었고 6학년을 맡게 되었다. 당시 103학급, 3부제 수업을 하고 있었기에 고학년을 맡아 수업시간이 많은 교사들은 학년말이 되어도 학부모와 선생님을 구별 못하는 일도 있었다. ‘이게 도심학교의 모습이구나!’ 새삼 느끼기도 했다.

반년 간 근무하다 박말갑 교장선생님께서는 서석학교로 영전하시고 이준호 교장선생님이 오셨다. 한결같이 교육철학이 뚜렷한 분들이셨다. 이듬해 교육계획 작성 팀에 소속되어 이준호 교장선생님의 철학이 담긴 장원초등학교 교육계획을 입수해서 학교장의 경영관, 목차 구조 등을 분석하고 우리 학교의 특색을 살리는 방향을 모색 했다. 캔트지 전지에 구조도를 그리고 연필로 고치기를 수 십 번, 이렇게 고생하고 만들어진 초안을 제시했더니 교장선생님께서는 ‘무슨 자료를 보고 만들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그간의 경위를 말씀드렸더니 면전의 칭찬을 보내시진 않았지만 그 열정에 점수를 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3월1일자로 연구주임에 발탁되었다. 조금은 황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연구력은 별로 없었으나 최선을 다했다. 교장선생님과는 1년간의 만남을 끝으로 장흥교육장으로 영전해 가셨지만 그분에게서 얻은 소득 또한 나에게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전라남도 교사명을 작성하는데 참여했고, 초등에서는 정균태 선생님(후, 전남도교육청 초등교육국장)과 같이 참여하였다. 그 때에 교장선생님께서는 스승의 길(師道銘)이라는 것을 부임하시는 곳마다 가지고 다니셨고 교무실에 게시했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우리가 제시한 의미를 담은 내용들이 상당 부분 채택되기도 했다.

당시에 확정된 ‘전남 교사명(全南 敎師銘)’은 다음과 같다.

‘ 全南 敎師銘’

우리는 빛나는 교사로서 충의의 얼과 그윽한 문화예술의 고장 전남의 자랑스러운 교사서 구국의 자세를 가다듬어 새 마음으로 새 시대를 여는 길잡이가 됨을 자부하고 새 역사를 창조해나갈 전인적인 인간 육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스승의 길을 걸어간다.

1. 숭고한 교육애로 학생의 알찬 성장을 돕는 스승이 된다.

2. 부단한 연수로 교육현장을 개선해 나가는 스승이 된다.

3. 밝고 깨끗한 사도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스승이 된다.

교감 승진시험 합격

이 교장선생님이 떠나시고 장성교육장님으로 계시던 나경수 교장선생님께서 부임하셨다. 5년간의 광주효동학교 생활 중 나 교장 선생님과는 3년이라는 세월을 같이 보냈는데 사연 또한 많았다. 부임과 동시에 우리 학교는 전라남도교육위원회 지정 조기영어 실험학교로 지정되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생소한 분야였고 인적자원도 부족하였으나 교장 선생님의 혜안과 열정에 우린 따라야 했고 그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소화되기까지는 실로 어려움도 많았다.

필자는 ‘선생님처럼 실천하고 싶습니다’ 광주광역시교육청(장학자료 2002. 02. 23), ‘잊지 못할 교장 선생님’이라는 책자에 나경수 교장선생님에 관한 몇 가지 얘기를 기고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의 전화를 받곤 했었다.

나는 연구주임 2년, 교무주임 2년이라는 중책을 맡아 100여 학급이 넘는 호남 제일의 다 학급으로 편제된 이곳 광주효동에서 교직생활의 꽃을 피웠었다.

그 수많은 선생님들! 3부제 학교 운영! 1년이 지나도 여선생님과 자모가 혼동되었던 시절이었지만 동료들을 신뢰하고 상사들의 의지를 배우며 살았던 삶이기에 후회 없는 시간들이었다.

벽지점수가 없어 승진을 포기하였으나 당시는 수요의 1.5배수를 시험에 응시하도록 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다행히 시골 등지에서 얻어 놓은 2·3 등급짜리 연구점수 등을 합산하여 간신히 이곳에서 교감승진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영광스럽게 합격하여 대단한 기쁨과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그때 당시는 승진시험 준비를 위해 모두 열성을 다해 공부하는 시기였으나 나는 포기상태에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공부 할 생각조차 없었다. 서류를 제출한 후에야 학원에 가서 약 2개월간 공부도 했으며 당시 일반 사회분야는 내 모교인 군남초등학교에서 5, 6학년 때 담임했던 탁영진(현 서울 희소고시학원 이사장)이라는 제자 강사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학교에서 퇴근하면 학원으로 달려갔고 학원이 끝나는 10시쯤이면 집에서 내용을 요약하여 켄트지에 적고 피로에 지친 몸으로 그 내용들을 벽걸이에 걸어 놓고 읽고 녹음하며 화장실에까지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공부했던 기억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했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참으로 열정에 찬 삶을 살았던 세월이었던 것 같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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